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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이 좋다> 평택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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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평택신문 │ 기사작성 2019-8-12 │ 조회2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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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리 평택민요
지역문화의 자부심이 되다.
평택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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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착각 속에 산다. 나에 대해서 잘 안다 혹은 타인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누구보다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냥 착각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부모들이 “내 아이는 그럴리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하는 말도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대상이 무엇이던 그것을 쉽게 생각하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는 습관은 더 많은 착각을 유발하게 한다. 그러한 습관에 편향된 사고까지 더해진다면, 착각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필자 또한 이런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새삼 깨달았다. 평소 내 고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던 필자다.

아니 최소한 잘 아는 축에는 들겠구나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마음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평택지역의 문화재에 관해서도 그런 자신감은 변함이 없었다. 깊이 있는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얄팍하게나마 알고 있는 정보들이 그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얼마 전 이런 착각에서 각성되는 계기가 있었다. 평택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을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우리고장에서 비롯된 우리의 소리, 평택민요가 지역문화의 자부심이 되도록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어영애 단장과의 만남을 통해 평택민요의 가치와 의미를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발굴에서 보전, 그리고 전승
지난 2009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평택민요는 평택지역에서 전승되는 노동요를 묶어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자칫 후대에 전승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평택민요를 발굴해낸 데에는 어영애 단장의 노력이 컸다. 어 단장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소리꾼이 되었지만, 소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은 늦은 시작을 충분히 만회할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어 단장은 2000년 중반 무렵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지켜보면서 평택지역 고유의 민속예술, 특히 소리꾼이었던 어 단장은 평택의 소리를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사비를 들여 농번기·농한기 할 것 없이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마을회관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어르신들에게 막걸리잔을 건네며 옛 이야기와 옛 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평택민요의 맥을 찾아가는 작업을 이어갔다. 이 와중에 농요 예능보유자인 이민조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민조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소리에 능했는데, 일찍부터 이 선생의 명성은 대단했다고 한다. 어 단장은 포승지역 농요의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이 선생을 만나면서 평택민요의 발굴에 자신감을 얻게 됐다. 이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전에 앞서 2007년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포승두레소리로 대회 우수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후 2009년 농요부문의 이민조 선생이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로 가장 먼저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고, 뒤이어 어로요부문의 이종구 선생, 장례요부문의 박용철 선생이 각각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 즈음 ‘평택민요보존회’가 결성돼 평택민요의 전승 및 보존에 애써오고 있다(*참고: 평택시史). 평택민요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에 얽힌 비화도 있었다. 당시 이민조 선생은 여러 가지 일로 마음고생이 심해 자신의 예능·기능을 후대에 전수할 마음이 없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민속학자들이 선생을 여러 차례 찾아 채곡을 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평택의 소리, 나아가 민족의 유산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많은 전문가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선생은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듣고 배우며 평생을 함께했던 농요를 후대에 전수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그즈음 이 선생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 위해 심사를 받는 자리에 삼고초려하며 이 선생의 농요를 채곡하고자 했던 민속학자가 심사위원으로 자리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의 소중한 소리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음은 큰 행운이었다.

민요는 나의 운명
어영애 단장은 중학생 무렵부터 민요를 좋아하고 즐겨들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팝송을 들을 때 중학생이었던 어 단장은 민요음반을 찾아들었다. 당시에도 민요는 비주류나 다름없었다. 음반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 단장의 민요사랑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어 단장의 아버지는 술 한 잔하고 기분이 좋아지면, 방문턱에 걸터앉아 시조를 읊고는 하셨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 가 없었단다. 유년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 단장을 민요에 빠져들게 했다.

그렇지만 업으로 소리를 할 형편은 못되어 취미삼아 민요를 즐겨듣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30대가 넘어 수지침을 배우려고 서울을 방문했던 어 단장은 운명처럼 민요와 재회하게 된다. 수지침학원과 같은 건물에 있던 ‘경기민요 전수관’이 눈에 들어왔다. 어 단장은 수지침을 배우면서 민요도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많은 욕심을 내지 않고 두곡 정도만 배워볼 참이었다. 민요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한곡조 정도는 부를 줄 알아야겠고, 혹시 모를 앙코르요청이 있으면 한곡 더 해야 하니 두곡은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취미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뜻밖에 소리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받게 됐다. 그 후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소리꾼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한다.

경기민요 기능보유자인 묵계월 선생으로부터 경기민요를 이수받기도 했다. 이후 향토민요의 발굴과 전승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평택민요를 발굴해내고, 평택민요보존회를 결성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3월에는 그간 어 단장의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어 단장은 평택민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방면에 걸친 노력을 해왔다. 전승학교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전통문화의 체험기회를 제공하는가하면, 평택민요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전통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동시에 지역민들에게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데도 기여하고 있다. 어 단장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민요를 시작했지만,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꿈을 좇아 실천에 옮긴 덕분에 지금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요와 소리를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어느 순간 평택민요의 산증인이 된 어영애 단장,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평택의 지정학적 위치탓에 평택민요는 다양한 지역의 특징을 고루 지니고 있다. 비교적 넓은 농토로 논농사가 발달해 농요가 발달할 수 있었고, 서해안과 맞닿아있어 어업요도 발달할 수 있었다. 악보나 글을 통하지 않고 그 지역의 특성과 노래 부르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즉흥성이 가미된 민요는 우리 선조들의 삶 그 자체다. 오래 전 평택지역에서 생업을 이어가던 선조들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평택민요’를 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평택민요의 보존은 평택민요보존회만의 몫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평택의 소리가 알려질 수 있도록 시민 모두 힘을 모아야겠다. 평택의 문화는 전승할 가치가 충분하다.

구원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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