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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칼럼-임대희 논설주간> 국난을 자초한 뼈아픈 경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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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평택신문 │ 기사작성 2018-5-31 │ 조회3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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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두 차례의 무능 외교로
국난을 자초한 뼈아픈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역사상 두 차례의 무능 외교로 온 백성이 치욕스러운 경험을 한 민족이다. 이조 14대 왕 선조 23년(1590년),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됐던 통신 정사 황윤경과 부사 김성일의 굴욕 외교, 26대 왕 고종(1907년)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견하였으나 회의장에 들어가 보지지도 못하고 특사가 자결했던 망국외교가 바로 그것이다.


 선조 23년 왜(倭)는 도요도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해 기세가 등등한 때였다.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화친하기를 권했으나 선조는 심의겸의 서인파와 김효원의 동인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황윤경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보냈다. 7월에 떠난 조선 통신사는 5개월이 지나도록 히데요시를 만나지도 못했다. 5 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히데요시가 우리 통신사를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는 떡 한 접시와 술 한 병을 내놓고 “많이 드세요”라고 조롱을 당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황윤경과 김성일은 귀국해서“왜구(倭寇)가 조선을 침탈할 것 같다”,“아니다”로 정 반대되는 의견을 보고했다. 왜는 그로부터 2년 후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7년간 온 강토를 마음껏 짓밟았으며 무능한 선조는 의주까지 파천을 해야 했다.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결단 났던 첫 번째 외교 치욕사였다.


 26대(1852~1919년) 고종은 적통(嫡統)이 아닌 흥선대원군의 둘째로 태어나 열두살  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약한 군왕’일수밖에 없었다. 임오군란, 동학혁명, 왕비 민비가 일본 낭인에 살해되고 결국 나라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만 군왕이었다.  


 1907년 6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은  다 꺼져가는 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이상철, 이준 등을 밀사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 인해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미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터인지라 이준 특사는 자결의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지금 새삼스러이 쓰라린 과거사를 되돌아보는 뜻은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모양세가 과거 두 차례의 굴욕 외교 상황과 너무나 흡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7.24 판문점 납북 정상회담을 두고 여야는 환상과 폄하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6,12 미북회담을 두고도 서로 상반된 예측으로 국론분열을 일삼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가장 즐기는 나라가 바로 옆에 두 나라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수출은 줄고,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가계 부채(負債)는 해마다 늘어만 가는 이 현실을 진정 애국자라면 외면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충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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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희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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