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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申聞鼓)조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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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환 │ 기사작성 2013-5-22 │ 조회3,9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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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제도는 중국 요임금이 아랫사람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감간지고'(敢諫之鼓)를 두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남조(南朝) 이후 기록에 등문고가 나타나고 당(唐) 이후 조당(朝堂)에 설치했으며, 송(宋)·명(明)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신문고는 백성들이 절차를 거쳐서도 해결하지 못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특수청원(特殊請願)·상소를 위해 대궐 밖 문루에 달았던 북이다.

1401년(태종 1년) 7월 송제(宋制)에 따라 등문고를 설치했다가 8월 신문고로 이름을 바꿨으며, 11월에는 신문고를 통한 청원·상소·고발 등의 처리규정이 자세히 마련됐다.

세종 때 '신'(申)자는 신하들끼리 서로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 쓰는 말로, 왕에게 전하는 데 쓰는 말이 아니라고 해서 잠깐 승문고로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대궐 안 문루에 설치하고 순금사가 관리하다가, 의금부 당직청으로 옮겼다.

소원(訴寃)할 때 서울은 주무관사에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렸는데, 그렇게 한 뒤에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를 쳐서 왕에게 직소했다.

한때 폐지됐다가 1471년(성종 2년) 12월 다시 설치됐고, 연산군 때부터 또다시 폐지됐다가 1771년(영조 47년) 11월 복구되는 등 여러 차례 변화를 겪으면서 말기까지 이어졌다.

조선에서는 상소·고발의 제도는 법제화돼 있었으나 신문고는 그 최후의 항고 시설로 임금의 직속인 의금부 당직청에서 주관, 북을 치는 자의 소리를 임금이 직접 듣고 처리하도록 했다.

즉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 주장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해 사헌부에 고소하고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 신문고를 두드리게 했는데, 이는 형식상 조선에서 민의상달의 대표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신문고의 사용에는 제한이 있어서 이서(吏胥)·복예(僕隸)가 그의 상관을 고발하거나 품관·향리·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혹은 남을 사주하여 고발케 하는 자는 오히려 벌을 주었으며, 오직 종사에 관계되거나 불법으로 살인하는 자 및 자기에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서 소원을 받아들였다.

신문고의 설치는 조선 초 관리들의 권리 남용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한편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일까지 신문고를 사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을 초래했다. 따라서 그 후 신문고 사용의 제한을 엄격히 하여, 《속대전》에 따르면 사건사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토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문고의 이용은 주로 서울의 관리들에게만 한정됐으며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일반 상인이나 노비 또는 지방 관민에게는 효용이 없게 됐다. 그러므로 신문고의 효용은 민의창달에 결부했다기보다 조선 초기에 특수한 신분층에 은총을 주고 한편으로는 관료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성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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